본 문 : 로마서 1장 16절

제 목 : 예수, 부끄러운 이름인가?


말씀요약


 루브르 박물관에는 17세기 프랑스 화가 외스타슈 르 쉬외르가 그린 〈에페소에서 설교하는 성 바울〉이 걸려 있습니다. 파리 금세공 조합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봉헌했던 작품입니다.

그림 속 바울은 한 손을 하늘로 들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서 어떤 사람은 넋을 잃고 듣고, 어떤 사람은 놀라 물러서고, 어떤 사람은 자기 마술 책을 불 속에 던집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장면입니다.

저는 바울의 손끝을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화려한 신전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늘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에베소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종교와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그 세련된 도시 한복판에서 바울은 “오직 예수”를 전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오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부끄러운 이름입니까?

1.복음은 언제나 세상과 부딪힙니다

바울의 전도로 사람들이 회개했고, 마술사들이 은 오만에 달하는 책을 불태웠습니다. 그러자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상으로 돈을 벌던 사람들의 이익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성난 무리는 두 시간 동안 “크도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여”를 외쳤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수도 좋고 아르테미스도 좋고, 모든 신이 같은 길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이런 소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환영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불편해졌고, 핍박받았고, 복음은 능력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세상에 아무 불편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십자가는 노예와 반역자를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점잖은 사람들은 그 말을 입에 올리기도 꺼렸습니다. 그런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구원자라고 전하는 일은 지식인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 종교인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사람을 설명하지만 건져내지 못합니다. 도덕적 노력은 사람을 훈련시키지만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복음만이 죽은 자를 살립니다.

2. 조선 땅의 전도자, 최권능 목사

이 바울의 마음을 뜨겁게 품은 분이 한국교회사에 있습니다. 최봉석 목사, 곧 최권능 목사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평안도와 만주 일대의 거리와 장터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고 미친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만 지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고, 투옥되었으며, 1944년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는 이에게는 우아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영혼을 향한 절박한 사랑은 이 시대 교회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밖의 핍박만이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안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도 있습니다.

“구원이 예수를 믿는 사람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다.” “다른 길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런 말은 관대하게 들리고, 진지한 사랑에서 나온 고민일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 진정성까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성경은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고 선포했습니다(행 4:12). 이 말씀을 “예수도 하나의 길”로 바꿔 읽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모든 길이 같다면 선교는 소동일 뿐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예수 없이도 같은 결과라면 바울의 고난도, 초대교회의 순교도, 최권능 목사의 옥중 죽음도 이유를 잃습니다.

셋째, 십자가가 값싸집니다. 다른 길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아들이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사라집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갈 2:21).

넷째, 우리는 감리교인입니다. 웨슬리는 1738년 올더스게이트에서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신 때문에 말을 타고 들판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다만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이 진리는 남을 정죄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누가 최종적으로 구원받는지 판정하는 일은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은 분명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붙든 사람의 태도는 오만이 아니라 눈물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했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파리는 오늘의 에베소입니다. 예술과 철학과 문화가 넘치고, 모든 것을 “각자의 취향”으로 존중하는 도시입니다. 이 속에서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될까, 관계가 어색해질까 두려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조용히 뒤로 물립니다. 그러나 루브르의 바울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그는 웅성거림에도 신전의 위용에도 흔들리지 않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대단한 지식도 세련된 논리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도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맺는 말

  1. 예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십자가의 수치를 지나 부활의 능력이 된 이름입니다.
  2. 구원의 길을 흐리는 가르침 앞에서 분별합시다. 진리를 희석하는 관용은 사랑이 아닙니다.
  3. 복음을 사랑으로 전합시다. 논쟁에서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건지려는 마음으로 말합시다.
  4. 한 사람을 품읍시다. 이번 한 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한 사람의 이름을 적고 매일 기도합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원입니다.
예수는 나의 생명입니다.
예수는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