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고린도전서 1장 21절

제 목 :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말씀요약

여러분, 요즘 누군가에게 전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한 세대 전만 해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 문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더 똑똑해졌고, 더 냉소적이 되었으며, 종교에 대한 불신은 깊어졌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면 손사래를 치고, 교회 이야기를 꺼내면 표정이 굳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이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살았던 시대는 어땠을까요?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의 본산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이 논리와 웅변으로 진리를 논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지성의 도시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역설을 선포합니다. 세상은 지혜로 하나님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고,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이 어리석다고 비웃는 그 메시지—전도—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두 개의 그림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첫 번째 그림: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 세상이 보는 십자가

16세기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를 보신 적 있습니까? 이 그림 속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보는 성화 속 그리스도와 완전히 다릅니다. 가시관에 찢긴 살, 못 자국에서 흘러나오는 피, 고통으로 뒤틀린 손가락, 회색빛으로 죽어가는 살갗. 이 그림은 그리스도를 조금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처참하고, 가장 추하고, 가장 실패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왜 그렸을까요? 이 제단화는 피부병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환자들이 있던 수도원 병원에 걸려 있었습니다. 화가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화려하고 승리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너와 함께 썩어가고, 너와 함께 찢기는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전도의 미련한 것”의 실체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가장 흉악한 죄수에게 내리던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에 달린 자는 실패자요, 패배자요, 저주받은 자였습니다(갈 3:13).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에는 바로 이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메시지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과학적이고, 약자들의 위안거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복음을 그뤼네발트의 그림처럼 ‘보기 흉한 것’으로 여깁니다.


두 번째 그림: 달리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 하나님이 보시는 십자가

그런데 20세기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성 요한의 그리스도》에서 십자가는 위에서, 하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도, 가시관도, 못 자국의 피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하늘과 빛나는 바다 위에 십자가가 신비롭게 떠 있고, 그리스도는 마치 온 세상을 감싸안듯 그 위에 계십니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같은 십자가 사건이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볼 때 십자가는 그뤼네발트의 그림처럼 처참한 실패요 미련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십자가는 온 우주를 구원하는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24절에서 선언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같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그뤼네발트의 시선과 달리의 시선, 그 둘 사이의 간격—바로 그 간격이 오늘 우리가 전도라는 사명을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도 전도해야 하는가?

1. 전도의 방법은 미련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더 세련되고, 더 논리적이고, 더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혜롭게 접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핵심은,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언변이나 전략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우리가 전도할 때 느끼는 무력감—”내 말이 저 사람 마음에 닿지 못하는 것 같다”는 그 좌절감조차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전도는 원래 세상 기준으로 ‘효율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신 방법입니다.

2. 전도가 어렵다는 것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 아덴(아테네)에서도 전도는 조롱거리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부활을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 17:32)

바울조차 조롱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의 어려움 앞에서 낙심할 때,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사도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씨를 뿌리는 것은 우리의 일이요, 자라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우리는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씨를 뿌려도 반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뿌리기를 멈춰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고, 순종은 우리의 몫입니다.

4. 한 영혼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논리로도 계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셨습니다(눅 15:4). 효율의 논리로 보면 미련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늘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5:10).

달리의 그림처럼, 하늘의 관점에서 한 영혼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사람, 전도지를 받지 않고 돌아서는 그 사람,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돌리는 그 사람—그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십자가 전체와 맞먹습니다.


맺는 말

그뤼네발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세상이 왜 복음을 미련하다고 여기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화려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되지도 않으며, 때로는 상처받고 거절당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달리의 그림처럼 눈을 들어 하늘의 관점으로 다시 보십시오. 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듯, 오늘 우리가 전하는 서투르고 거절당하기 쉬운 그 한마디가 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의 전도를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있는 그 한 사람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눈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그 한마디를 전하십시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